전체 글 (29) 썸네일형 리스트형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저자 클레어 키건출판 다산책방발행 2023.11.27. P.53~54펄롱은 트럭에 올라타자마자 문을 닫고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달리다가, 길을 잘못 들었으며 최고 속도로 엉뚱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음을 깨닫고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가자고 스스로를 달랬다. 바닥에서 기어다니며 걸레질을 해서 마루에 윤을 내던 아이들, 그 아이들의 모습이 계속 생각났다. 또 수녀를 따라 경당에서 나올 때 과수원에서 현관으로 이어지는 문이 안쪽에서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는 사실, 수녀원과 그 옆 세인트마거릿 학교 사이에 있는 높은 담벼락 꼭대기에 깨진 유리 조각이 죽 박혀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또 수녀가 석탄 대금을 치르러 잠깐 나오면서도 현관문을 열쇠로 잠그던 것도. 안개가 여기저기 기운 .. 어톤먼트 어톤먼트 감독 조 라이트 각본 크리스토퍼 햄튼 원작 이언 매큐언의 《속죄》 주연 키이라 나이틀리, 제임스 맥어보이, 시얼샤 로넌 개봉 2008(2007) Dearest Cecilia, the story can resume. The one I had been planning on that evening walk. I can become again the man who once crossed the surrey park at dusk, in my best suit, swaggering on the promise of life. The man who, with the clarity of passion, made love to you in the library. The story can resume. I wil.. 눈과 귀 그래서 우리는 음악을 듣는다 저자 히사이시 조, 요로 다케시 역자 이정미 출판 현익출판 발행 2023.11.30. P.55~60 ― 시간이 관계하게 되면 논리적인 구조가 생겨나지요? ― 맞습니다. 예를 들어 무언가를 말로 차근차근 설명할 때는 순서를 따르게 되지요. 논리란 그런 거니까요. 귀는 논리성 그 자체입니다. 눈은 귀와 성질이 완전히 달라서, 한눈에 보고 이해하지요. 그래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는 거예요. 백 번 들려주는 쪽은 순서대로 구구절절 말하지만 눈으로는 한 번만 보면 이해가 된다는 거예요. (…) 청각이 원래 가지고 있는 성질이 바로 논리성입니다. 시각은 그런 논리성이 없어요. 눈앞에 있는 것이 전부 들어오니까요. ‘이렇게 다 보이는데 어쩔 수 없잖아?’라는 것이 눈의 논리예요(웃.. 거미여인의 키스 거미여인의 키스 저자 마누엘 푸익 역자 송병선 출판 민음사 발행 2000.06.12. 원제 El Beso de La Mujer Araña(1976) P.266~268 「몰리나…… 아직도 창피해 죽겠어……」 「뭐가 창피하다는 거야?」 「오늘 아침에 내가 너무 심했어」 「바보 같으니라고……」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은…… 구두쇠야. 그런 사람은 자기 것을 주는 것도 싫어하거든」 「그렇게 생각하니?」 「그래. 계속해서 그 생각을 하다가 얻은 결론이지. 나한테 너무 잘해 주었는데도 신경에 거슬렸던 것은…… 내가 너와 똑같이 해 줄 수 없어서 그랬던 거야」 「그렇게 생각해?」 「그래, 그래서 그랬던 거야」 「글쎄…… 나도 생각해 봤는데, 갑자기 네가 한 말이 생각났어. 네가 왜 그런 식으로 했는지 난 이제 완전히 .. 결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무내용 각각의 계절 中 〈기억의 왈츠〉 저자 권여선 출판 문학동네 발행 2023.5.7. P.218 그건 무엇이었을까. 내 속에서 예기치 않은 순간에 발사된 것은. 지금의 내 생각에 그건 아마 당시에 내가 가지고 있던 어두운 정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물네 살의 삶이 품을 수밖에 없던 경쾌한 반짝임 사이에서 빚어진 어떤 비틀림 같은 것, 그 와중에 발사되는 우스꽝스러움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어지간한 고통에는 어리광이 없는 대신 소소한 통증에는 뒤집힌 풍뎅이처럼 격렬하게 바르작거렸다. 턱없이 무거운 머리를 가느다란 목으로 지탱하는 듯한 그런 기형적인 삶의 고갯짓이 자아내는 경련적인 유머가 때때로 내 삶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사된 건 아니었을까. P.236~237 그 당시 내게 경서를 향한 특별한 감정과 욕.. 신자유주의, 식민 지배, 젠더 갈등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 정희진 출판 교양인 발행 2023.11.24. P.8~9 20년 전 《페미니즘의 도전》(2005년)을 처음 펴냈을 때, 이미 한국은 글로벌 자본주의에 급속히 편입되고 있었다. 신자유주의 통치 체제가 우리의 삶에 깊이 침윤하기 시작했다. 각자도생을 위해 자기 계발 열풍이 불었지만, 오래갈 리 없는 이 노력에 지친 사람들은 ‘힐링’과 정의를 갈망했다. 신자유주의 시스템은 계급의 양극화에 대한 자본주의의 성공적인 처방이다. 이제 부모의 계급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자기 계발만으로 자원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고립되고 방치된 개인들은 생존을 유지하고 시민권을 얻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젠더 정체성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강력.. 현대 과학은 아직 모른다 아무튼, 영양제 저자 오지은 출판 위고 발행 2023.12.25. P.46 영양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다양한 정의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전세계의 조상들이 좋아하던 나무뿌리나 풀뿌리를 캡슐이나 알약 안에 넣은 것’이 아닐까. 약간의 현대 과학적인 설명을 붙여서 말이다. 녹차를 마시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어느 중국 할머니가 말했다. 현대 과학은 그 편안함이 그 안에 들어 있는 테아닌에서 온다고 밝혔다. 아슈와간다를 먹으면 잠을 깊게 잘 수 있다고 어느 인도 할아버지가 말했다. 현대 과학은 그 안에 든 위타노사이드 덕분이라고 밝혀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이다. 사실은 테아닌이 혼자 하는 일이 아닌, 녹차 안에 든 어쩌구와 저쩌구와, 무엇보다 녹차를 마시는 시간의 고요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갈 곳 없는 마음의 편지 당신께 저자 오지은 출판 김영사 발행 2023.02.28. P.208 슬슬 새로운 요령과 기술이 필요한 것 같죠. 그동안은 즐겁기 위한 기술, 심심하지 않기 위한 기술, 태연한 척하는 기술, 집중하는 기술, 뭉개버리는 기술 등을 연마해왔는데요. 그게 다가 아닌가 봅니다. 처음으로 멈추는 기술, 공백을 마주하는 기술, 숨에 집중하는 기술을 익혀보려 합니다. 미래로 또는 과거로 도망가려는 마음을 잡고, 최선을 다해 멈춘 후에, 현재의 숨을 쉬는 것. 거창하지만 6일차에 도망쳐 나온 사람답게 그냥 코끝에 집중을 하고 숨을 쉬는 정도입니다만 충분히 좋습니다. P.246 저는 이제 허상에 겁먹지 않으려고 합니다. 허상이 아무리 크게 보여도 잡아먹히지 않을 것입니다. 허상이니까.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눈앞에 존재하는.. 균형, 순환, 공존 나의 사주명리 : 심화 편 저자 현묘 출판 날 발행 2023.6.26. P.103 하나의 기운이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무엇일까? 음양의 수준에서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음은 양을 지향하고, 양은 음을 지향한다. 즉 반대편을 지향한다. 그래야만 서로 공존할 수 있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지향하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우주적인 관점에서든, 초미시적인 양자의 영역에서든 대립되는 두 개의 기운으로 인해 존재가 가능해진다. 다른 천체 주변을 회전하지 않는 천체는 없으며, 초미시적인 관점에서도 모든 존재는 쌍을 이루고 있다. P.105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오행의 순환은 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생은 극의 결과물일 뿐, 실제로 모든 .. 긍게 사램이제 아버지의 해방일지 저자 정지아 출판 창비 발행 2022.09.02. P.138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싫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관계를 맺지 않았다. 사람에게 늘 뒤통수 맞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탓인지도 몰랐다. P.98 아버지는 내가 아는 한 단 한순간도 유물론자가 아닌 적이 없었다. 먼지에서 시작된 생명은 땅을 살찌우는 한줌의 거름으로 돌아가는 법, 이것이 유물론자 아버지의 올곧은 철학이었다. 쓸쓸한 철학이었다. 그 쓸쓸함을 견디기 어려워 사람들은 영혼의 존재를, 사후의 세계를 창조했.. 우주에 우열은 없다 명리 : 운명을 읽다 / 명리 : 운명을 조율하다 저자 강헌 출판 돌베개 발행 2015.12.14. / 2016.12.30. Vol.1 P.36 사주에 좋고 나쁜 게 과연 있을까? 사실 우주에 좋고 나쁜 건 없다. 그저 우리의 관점일 뿐이다. 명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제일 처음 넘어야 할 장벽은 ‘인간에 대한 시기심’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기심이란 대체 무엇일까? 나보다 남들은 더 많이 가진 것 같고, 나는 못 사는데 다들 잘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시기심이다. 시기심은 자신을 망치고, 자신이 이해해야 할 것들을 가로막는다. 이 시기심을 넘어야 명리학 공부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기심은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이 우주엔 좋고 나쁜 것과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이 없다”는 마음을 가.. 불쑥 솟은 한순간과 그 아래 깔린 시시한 것들에 대해 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中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 저자 이미상 외 출판 문학동네 발행 2023.04.05. P.41 고모는 몇 번이나 조카들과 모닥불가를 박차고 나와 숲을 헤매는 상상을 했다. 할 순 있지만 정말 하기 싫은 일. 때려죽여도 하기 싫은 일. 실은 너무 두려운 일. 왜 할 수 없는 일보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이 사람에게 더욱 수치심을 안겨주는 것일까. 무경은 고모의 그 일을 해주었다. 고모는 무경이 그 일을 해주었을 때 자기 안에 있는 구원을 바라는 마음을 보았다. P.41~42 “단편소설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한 포인트를 융기시킨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 불쑥 솟은 한순간 아래 모든 문장과 장면이 깔리게 되는 거죠. 좀 비민주적이지 않아요?” .. 10년 뒤 1시의 내 모습은 제 마음대로 살아보겠습니다 저자 이원지 출판 상상출판 발행 2019.11.13. P.157~158 여느 때처럼 동기들과 도시락을 까먹고 자리에 앉아 멍하니 벽시계를 바라봤다. 1시가 되기 전에 자발적으로 일을 하는 직장인이 몇이나 될까. 나 또한 단 1초라도 먼저 키보드를 잡고 싶지 않았다. 순간 ‘10년 뒤 1시’ 그때도 이렇게 벽시계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는 내 모습이 하얀 벽 위로 뚜렷하게 그려졌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아프리카 들판을 누비고 바람을 느끼던 그때의 결심처럼 살아가리라. (…) 그날 집에 오자마자 사직서 양식을 찾았다. 퇴사의 이유는 뭐라고 적어야 할까. 개인 사유라고 쓰면 될까. 현관에서 펑펑 우는 모습을 본 탓인지 그만둘 거라는 내 말에도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 영상 속의 내가 나에게 전하는 오늘도 취향을 요리합니다 저자 박미셸(it's Michelle) 출판 서스테인 발행 2022.8.19. P.173 나는 결코 모든 빵을 집에서 굽거나 끼니마다 화려한 요리를 하는 게 아니다. 매번 그렇게 할 만큼 부지런하지도 못하거니와 연년생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는 훌륭한 핑계로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밥을 하기도 전에 체력이 방전돼서 대충 때운 날이 부지기수였다. 그럼에도 스스로 정해둔 약속은 꼭 지키려고 노력했는데, 그중 가장 열심히 실천한 것이 ‘음식은 그릇에 덜어 먹기’와 ‘나를 위한 반찬 하나라도 만들기’였다. 이 두 가지만 지켜도 밥상이 꽤 그럴싸해 보이기 때문이다. (…) 거창한 요리를 하지 않아도, 중요한 건 현재의 기분을 인지하고 나를 위해서 뭐라도 만들어 먹는다는 목적과 결과다. P.20.. 다만 나는 불꽃이오 미스터 션샤인극본 김은숙 연출 이응복 출연 이병헌, 김태리, 유연석, 김민정, 변요한 외 방송 2018.7.7. ~ 2018.9.30. 고애신 동지인 줄 알았으나 그 모든 순간 이방인이었던 그는 적인가, 아군인가. 신문에서 작금을 낭만의 시대라고 하더이다. 그럴지도. 개화한 이들이 즐긴다는 가배, 불란서 양장, 각국의 답례품들. 나 역시 다르지 않소. 단지 나의 낭만은 독일제 총구 안에 있을 뿐이오. 혹시 아오? 내가 그날 밤 귀하에게 들킨 게 내 낭만이었을지. 나도 그렇소,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 할아버님께는 잔인하나 그렇게 환하게 뜨거웠다가 지려 하오. 불꽃으로. 그 생각을 내가 안 해봤을 것 같소? 가보지도 않은 미국의 거리를 매일 걸었소. 귀하와 함께 나란히. 그곳에서 공부.. 술친구 아무튼, 술 저자 김혼비 출판 제철소 발행 2019.5.7. P.82 그러니까, 그 집은 최선을 다하고 있는 집이었다. 별생각 없이 적당히 구색만 맞추고 살 뿐 물건 하나하나에 딱히 애정이 없고, 사놓고 안 쓰는 물건과 써야 하는데 안 사둔 물건들이 항시 생기는 나태한 나의 집과는 전혀 다른 집. 단정한 삶을 꾸려가는 주인의 심지가 중심에 단단히 박힌 집. 예전부터 허물없이 친한 관계를 두고 ‘서로 집에 수저가 몇 벌 있는지까지 다 알고 사는 사이’라고 말하는 걸 들을 때마다, 나는 내 집에조차 수저가 몇 벌 있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나는 나 자신과 친하지 않은 걸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혼자 사는 집에 수저 몇 벌 있지도 않은데. 그러면서도 근데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정말 있을까? 생각한 것도 사실.. 우리는 공원에 간다 우리는 공원에 간다 그림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지음 사라 스트레스베리 번역 안미란 출판 롭 발행 2023.02. 본문에서 사람들은 우리가 별에서 왔다고 한다. 우주의 먼지에서 생겨나, 아주 먼 옛날 어디에선가 이 세상으로 날아왔다고. 하지만 잘 모르겠다. 때로 삶은 온통 그리움으로 가득한 것 같다. 누군가 바람에 실려 내 곁에 다가왔으면 하는 아뜩한 그리움. 헨쇼 선생님께 헨쇼 선생님께 저자 비벌리 클리어리 출판 보림 발행 2005.3.1. P.143 엄마는 아직도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았다. 뭔가 내 나름대로 아빠를 즐겁게 해 드려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어린이 작품집》을 가져다 거기 실린 내 글을 보여 드렸다. “재밌게 잘 썼구나. 참 신기하네! 나도 양조장에 갈 때마다 그날을 떠올리곤 했거든. 그런데 너도 기억하고 있다니.” 아빠가 이렇게 말해 줘서 나는 정말 기뻤다. 아빠는 잠시 동안 나를 아주 찬찬히 바라보았다. 마치 내 얼굴에서 뭔가 찾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뭔지 나는 모른다. 그러더니 아빠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너는 확실히 아빠보다 영리하구나.” 아빠가 이렇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좀 무안했다. 어떻게 ..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이토록 평범한 미래 저자 김연수 출판 문학동네 발행 2022.10.7. P.34~35 1999년 여름, 1학기 종강 파티가 끝나고 지민이 내게 자신은 곧 죽을 사람이라고 말할 때만 해도 나 역시 이런 미래를 상상하지 못했다. 어릴 때 내가 상상한 미래는 지구 멸망이나 대지진, 변이 바이러스의 유행이나 제3차세계대전 같은 끔찍한 것 아니면 우주여행과 자기부상열차, 인공지능 등의 낙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1999년에 내게는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이 있었다. 미래를 기억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과 일어날 일이었을지도 .. 식물들을 심을게요 지구 끝의 온실 저자 김초엽 출판 자이언트북스 발행 2021.08.18. P.82 아영은 그렇게 느리고 꾸물거리는 것들이 멀리 퍼져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천천히 잠식하지만 강력한 것들,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정원을 다 뒤덮어버리는 식물처럼. 그런 생물들에는 무시무시한 힘과 놀라운 생명력이, 기묘한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영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P.353~354 “식물들이 정말로 우리를 지켰을까요? 그건 어쩌면 제 어린 기억 속에서 왜곡된 환상은 아니었을까요? 한평생 프림 빌리지를 그리워하면서도 나는 매 순간 그 기억을 심문하곤 했어요. 사실은 그 모든 일들을 하면서도 어쩌면 모스바나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고요.”.. 미스터김 쇼코의 미소 저자 최은영 출판 문학동네 발행 2016.07.07. P.62 나는 할아버지를 영화제에 초대하지 못했었다. 팔순이 다 된 노인이 굳이 이것 때문에 서울에 올라오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고, 내 앞으로 지급된 표는 내가 인정받고 싶었던 영화계 사람들에게 뿌린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시사회에 오실 수 있느냐고도 묻지 않았었다. 할아버지가 보여달라고 한참이나 보챈 뒤에야 나는 노트북에 저장해놓은 영화를 할아버지 앞에서 틀었었다. 집을 잃은 소녀가 공사가 중단된 빈 아파트에 살다 쥐로 변하는 내용의 십오 분짜리 단편영화였다. 영화는 당연히 혹평을 받았다. 선악의 경계가 너무 분명하고 메타포가 강해서 세련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무 평도 내리지 않고 그저 내게 묻기만.. 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는걸요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 감독 칸치쿠 유리 출연 사토 타케루, 미츠시마 히카리, 야기 리카코, 키도 타이세이 외 공개 2022.11.24. 당신만을 위해 자리를 남겨둘게요 내가 다른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더라도 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는걸요 사랑하는 법을 기억할게요 당신이 가르쳐준 그 사랑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당신을 기억할게요 어디서 살 것인가 어디서 살 것인가 저자 유현준 출판 을유문화사 발행 2018.05.30. P.10 건축은 인간의 본질을 반영하는 행위이자 결과물이다. 건축은 우리와 연결되어 있고 우리의 모습을 비춘다. P.28~29 우리나라에서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식판에 똑같은 밥을 배급받아 먹는 곳은 교도소와 군대와 학교밖에 없다. 학교는 점점 교도소와 비슷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에 이런 시설에서 12년을 보낸다면 그 아이는 어떤 어른으로 자라게 될까? 똑같은 옷, 똑같은 식판, 똑같은 음식, 똑같은 교실에 익숙한 채로 자라다 보니 자신과 조금만 달라도 이상한 사람 취급하고 왕따를 시킨다. 이런 공간에서 자라난 사람은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평생 양계장에서 키워 놓고.. 사실은 착한 아이란다 창가의 토토 저자 구로야나기 테츠코 출판 프로메테우스 발간 2004.01.29. P.31~32 토토는 좀 슬픈 생각이 들었다. 토토가 한참동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교장선생님이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토토의 머리에 크고 따뜻한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자, 이제부터 넌 이 학교 학생이다.” 그때 토토는 왠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짜 좋아하는 사람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자기 얘기를 들어준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오랜 시간 동안 단 한번도 하품을 하거나 지루한 표정을 짓지도 않고, 토토가 얘기할 때처럼 똑같이 몸을 앞으로 내민 채 열심히 들어 주었던 것이다. 토토는 그때 아직 시계를 볼 줄 몰랐는데―.. 얼굴은 하나의 명령 아무튼, 비건 저자 김한민 출판 위고 발행 2018.11.22. P.55 “그렇다면 우리 인류가 50년 후에 지금을 되돌아봤을 때,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일이라고 여길 일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마디로 21세기의 ‘홀로코스트’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있다면요?” 초대 손님은 대답했다. “제 생각에는 공장식 축산입니다. 즉, 인류가 공장식 축산에서 동물들을 다루는 방식 말입니다. 미래 인류가 돌아본다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P.7 이 책은 타자에 관한 책이다. 한 편의 시 같은, 철학자 레비나스의 말로 시작해보자. 참으로 아름다운 삶은 그냥 존재함의 차원에 만족하는 조용한 삶이 아니다. 사람답게 사는 삶은 타자에 눈뜨고 거듭 깨어나는 삶이다. P.16 비건의 핵심은 거부가 아니라 연결에 있다.. 호흡이 안정되기를,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를 요가 다녀왔습니다 저자 신경숙 출판 달 발행 2022.11.16. P.20~21 수술은 복강경으로 진행되어 크게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사흘인지 나흘인지 입원을 했었는데 병실의 창이 거리를 향해 나 있어서 밤에 잠들기가 어렵기는 했다. 커튼을 내려도 어슴푸레한 빛이 자꾸만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 빛 속에서 천장을 보며 누워 있다가 결국은 일어나 책을 읽었을 것이다.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아가야, 나에게 와…… 중얼거렸을지도. 그 일은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이 없다. 건강검진 때조차 수술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아무 표시를 하지 않았다. 그 수술 이후에 나에게 꿈처럼 아이가 왔다면…… 아마도 그 아이에게는 내가 너를 얻기 위해 수술을 했었다고 말했을지도 모를 .. 나를 받아들이려는 열정 아무튼, 요가 저자 박상아 출판 위고 발행 2019.05.08. P.17 정말 너무나 불편했다. 선생님이 자세를 안 보여주고 말로만 하니 도무지 뭘 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어서 중간중간 짜증 가득한 얼굴로 선생님을 쳐다봤다. 그렇게 매번 짜증이 일 때마다 선생님을 쳐다보는데, 어느 순간부터 옆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쉬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정말 덩치가 컸고, 어떤 이는 정말 뻣뻣해 보였고, 또 어떤 이는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너무나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세상에 그런 열정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과시하거나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에게 집중하고, 그런 나를 받아들이려는 열정. 요가복은커녕 목.. 마음이 하는 일은 뻔하지만 마음이 하는 일 저자 오지은 출판 위고 발매 2022.05.30. P.6 혼자 여행을 떠나 기차에 탔을 때, 아름다운 자연 속을 달리는 것도 좋았지만 어떤 집 담벼락 옆을 천천히 달리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빨래나 햇볕에 널어둔 두툼한 이불, 그리고 날아가지 말라고 가운데에 집어둔 아주 커다란 집게를 보면 나도 모르게 하, 하고 짧은 숨을 뱉었다. 그건 정화였을까. 시스티나 벽화를 본 것도 아니고 고작 누군가의 빨래에. P.10 에세이는 삶을 직시하지 않으면 쓰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본인의 삶이든, 타인의 삶이든,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든, 괴로워도 바라봐야 한다. 도망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글로 만들려면 아주 오래 바라봐야 한다. 그래서 에세이는 용감한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시대에 따라 ‘생각이 가..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