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끝의 온실
저자 김초엽
출판 자이언트북스
발행 2021.08.18.
P.82
아영은 그렇게 느리고 꾸물거리는 것들이 멀리 퍼져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천천히 잠식하지만 강력한 것들,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정원을 다 뒤덮어버리는 식물처럼. 그런 생물들에는 무시무시한 힘과 놀라운 생명력이, 기묘한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영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P.353~354
“식물들이 정말로 우리를 지켰을까요? 그건 어쩌면 제 어린 기억 속에서 왜곡된 환상은 아니었을까요? 한평생 프림 빌리지를 그리워하면서도 나는 매 순간 그 기억을 심문하곤 했어요. 사실은 그 모든 일들을 하면서도 어쩌면 모스바나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고요.”
나오미는 아영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모스바나가 무엇인지가 제게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에요. 저는 그냥 그곳에서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던 거예요. 프림 빌리지를 다시 만들 수 없다는 것도, 그런 곳은 오직 프림 빌리지뿐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식물들을 심었어요. 오직 그것만이 저를 살아가게 했으니까요.”
P.385
아영은 이곳에 있었을 누군가의 안식처를 그려볼 수 있었다.
해 지는 저녁, 하나둘 불을 밝히는 노란 창문과 우산처럼 드리운 식물들. 허공을 채우는 푸른빛의 먼지. 지구의 끝도 우주의 끝도 아닌, 단지 어느 숲속의 유리 온실. 그리고 그곳에서 밤이 깊도록 유리벽 사이를 오갔을 어떤 온기 어린 이야기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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