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술
저자 김혼비
출판 제철소
발행 2019.5.7.
P.82
그러니까, 그 집은 최선을 다하고 있는 집이었다. 별생각 없이 적당히 구색만 맞추고 살 뿐 물건 하나하나에 딱히 애정이 없고, 사놓고 안 쓰는 물건과 써야 하는데 안 사둔 물건들이 항시 생기는 나태한 나의 집과는 전혀 다른 집. 단정한 삶을 꾸려가는 주인의 심지가 중심에 단단히 박힌 집. 예전부터 허물없이 친한 관계를 두고 ‘서로 집에 수저가 몇 벌 있는지까지 다 알고 사는 사이’라고 말하는 걸 들을 때마다, 나는 내 집에조차 수저가 몇 벌 있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나는 나 자신과 친하지 않은 걸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혼자 사는 집에 수저 몇 벌 있지도 않은데. 그러면서도 근데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정말 있을까?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그는 그걸 알고 있을 것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다. 이 집이 소곤대는 이야기들이 나는 무척 좋았다.
P.90
어떤 술꾼들은 취기에서 술맛을 보듯이 어떤 사람은 치기에서 결단의 힘을 본다. 치기 어린 상태가 아니면 모험할 엄두를 못 내는 겁 많은 나 같은 사람이.
P.90
냉장고 문을 닫는 순간 몇 시간 후 시원한 술을 마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듯이, 신나서 술잔에 술을 따르는 순간 다음날 숙취로 머리가 지끈지끈할 가능성이 열리듯이, 문을 닫으면 저편 어딘가의 다른 문이 항상 열린다. 완전히 ‘닫는다’는 인생에 잘 없다. 그런 점에서 홍콩을 닫고 술친구를 열어젖힌 나의 선택은 내 생애 최고로 술꾼다운 선택이었다. 그 선택은 당장 눈앞의 즐거운 저녁을 위해 기꺼이 내일의 숙취를 선택하는 것과도 닮았다. 삶은 선택의 총합이기도 하지만 하지 않은 선택의 총합이기도 하니까. 가지 않은 미래가 모여 만들어진 현재가 나는 마음에 드니까.
'not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상 속의 내가 나에게 전하는 (0) | 2023.04.11 |
---|---|
다만 나는 불꽃이오 (1) | 2023.04.04 |
우리는 공원에 간다 (0) | 2023.03.08 |
헨쇼 선생님께 (0) | 2023.03.03 |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한 (0) | 2023.03.03 |